열달후에 가이드

딩크부부, 난임부부가 되다 (난임에세이)

턱걸이로 아기집 미션을 통과하다

이번 주말을 힘겹게 보내면서 난 그렇게 힘들다던 내려놓음을 약간이나마 배운 것 같다. 처음에 큰 기대 없이 시작한 시험관 시술이 신선 1차에 착상이 성공하자 강박증에 가깝게 이 시술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집착이 생겼었다. 하지만 이 미친듯한 열망은 지난 금요일 아기집을 못 본 후 착 가라앉은 지 오래다.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을 지인들이 본다면 너 아기 싫어한다는 거 다 뻥 아니냐며 딩크로 어떻게 6년이나 살았냐고 의아해할 것 같다.

시험관을 하면서 백만 가지 감정을 느꼈다. 기뻤다가, 초조했다가, 슬펐다가, 하늘이 무너졌다가, 안도했다가, 화가 났다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다 느껴보라고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이 시술은 사람을 참 겸손하게 한다. 최선을 다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부분에서.

성적이 떨어지면 잠을 줄여 공부를 더 하면 되고 다이어트를 하고 싶으면 식이조절을 하고 운동을 하면 된다. 코가 높아지고 싶으면 성형외과에 가서 예쁘게 수술을 하면 되고 요리실력을 키우고 싶으면 주방에서 계속 시도하고 연습하면 실력이 자란다.

하지만 난임시술은 내가 잠을 줄였다고, 연습하고 노력했다고, 운동을 했다고, 좋은 병원을 찾아갔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전력을 다했는데 결과물의 성공이 개런티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생맥주와 와인이 없는 삶은 인생이 아니라던 내가 술을 완전히 다 끊은 지 오래였고 와식 생활 주의자인 내가 요가를 하고 둘레길에서 만보씩 걸었다. 고기를 싫어하는 나지만 단백질 섭취를 위해 고기 냄새를 참아가며 먹었고 플라스틱 그릇은 모조리 다 유리로 바꿨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뉴에이지를 들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야행성에 가까운 인간이지만 12시 전에 잠드는 생활패턴으로 바꿨다.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일요일 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난 찰싹이가 잘 커서 출산까지 잘 간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아."

남편은 말했다.
"너 배탈 날 때마다 영혼 팔아서 이제 팔 것도 없잖아."

그래, 나 장 트라볼타다. 그럼 니 꺼라도 팔아라  -_-


***

초조하게 기다리는 내 맘과 달리 병원 예약은 오후에 잡혀있었다. 다급한 마음 같아선 아침 첫 진료로 보고 싶었지만 담당 선생님은 오늘도 오후 진료였다.

다행히 오늘은 초음파실이 붐비지 않았다. 오늘은 아기집이 잘 보일까. 여전히 질식 초음파로는 아기집은 무슨 근종만 아주 잘 보였다. 선생님은 토요일에 나팔관 입구까지 다 뒤져봤으니 그냥 복부 초음파로 보자고 했다.  

토요일처럼 배가 터질 만큼 눌러대지도 않았는데 화면에는 아기집이 동그랗게 보였다.
선생님은 "아기집이 자랐네요."라고 하셨다. 감사합니다!!!

6월에 처음 이 병원을 찾았을 때 초음파실에서는 단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초음파실 안내 화면에는 계속 '이곳에서는 결과를 안내하지 않으니 진료실에서 결과를 들으라'는 안내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기집 찾기 미션을 수행 중인 지금, 나는 초음파실 선생님과는 거의 베프다. 아마 내가 들어간 초음파실이 제일 시끄러웠을 것 같다.

보통 초기에는 복부 초음파가 잘 안 보여서 질식 초음파를 보는데 왜 나는 복부 초음파로 아기집이 보이는 것일까. 선생님께 물었더니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한데 착상 위치에 따라 복부 초음파로만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다. 문제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기가 집 위치를 자기가 편한 곳에 잡은 건데 그게 질식 초음파로 잘 안 보이는 자리일 뿐이라고.

찰싹이는 왜 숨어있어서 이렇게 모두를 놀라게 했는지.

초음파실 선생님은 시크하게 말씀하셨다. "뭔 초음파 오더를 맨날 넣어서 애가 찔끔찔끔 크는 것처럼 보이잖아. 일주일은 지나고 와야 팍팍 크지! 좀 지나고 와요 이제. 초음파 계속 보면 아기가 스트레스받아해."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난 개비스콘 아저씨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진료실에서 고구마 백개 먹은 듯한 답답함을 여기서 이렇게 해소하네. 아기집 크기는 괜찮냐고 물었는데 그건 진료실 가서 들으라고 하셨다. 초음파실을 나서려는데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주셨다.

넌 이제 찰싹 잘 붙었으니 이제부터 튼튼하게 자라라고 '튼튼이'다. (어디선가 태아는 태명을 따라간단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마음을 놓고 진료실에 가서 도착 확인을 했는데 내 앞에 대기가 30명이다. 이럴 거면 도대체 예약시간을 왜 잡아주는 건지. 한 사람 당 3분씩만 잡아도 90분이다. 최소 한 시간 반은 지나야 내가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임신 초기는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라더니 병원에서 장시간 대기하느라 스트레스 쌓여, 그다지 편하지 않은 병원 대기 의자에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해서 배에 무리가 가. 소파에 그냥 나 몰라라 눕고 싶었다.  

오늘 안에 줄어들 것 같지 않던 대기는 오후 6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내 차례가 왔다. 내 뒤로도 20명의 대기 환자가 더 있었다. 6시가 넘으면 퇴근시간과 맞물려서 서울역부터 도로가 주차장이 된다. 큰일이다.

거의 세 시간 만에 만난 선생님은 "다행히 아기집이 보였네요. 다음 주에 오세요. 몸 어디 불편한 곳은 없죠?" 끝. 이럴 거면 그냥 초음파 보고 집에 가라고 하고 문자로 내용을 알려주지... 정말이지 병원 대기 시스템 좀 고쳐달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난임 병원에서는 난임 환자는 을이니까 소심하게 "저는 몇 주차인가요"라고 물어봤다.

채취 날부터 계산하면 되고 현재 5주 4일 차이며 출산 예정일은 2021년 5월 28일이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조심하라고 했다.

아기집 크기도 묻고 싶었고 근종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대기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선생님을 붙잡고 더 이상 뭘 물어봐야 제대로 된 답을 듣긴 힘들 것 같았다. 선생님과 간호사는 거의 랩을 하는 수준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처방해주는 약을 찾아서 집에 오는 버스를 탔는데 자리는 하나도 없고 도로는 말 그대로 주차장이었다.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데 배가 너무너무 뻐근했다. 아, 이래서 티가 안나는 초기 임산부한테 자리를 양보해주라고 임산부 배지를 주는구나. 난 배지도 없는데 어떡하지. 앞에 앉아계신 할저씨한테 나 초기 임산부인데 배가 너무 당겨서 그러니 자리 좀 양보해달라고 말할 뻔했다.

***

아기집을 보았으니 이제 다음 주에는 아기집이 더 자라서 난황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심장소리가 잘 들려야 한다. 간호사 선생님은 다음 주까지 아기집 잘 키워서 오라고 했다. 아기집을 잘 키우려면 내가 뭘 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연휴가 끼어있으니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또 턱걸이로 허덕허덕 아기집 관문을 통과했다. 임테기부터 정말이지 간신히 모든 관문을 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넘어가면 된다. 지난주 금요일처럼 또 참담하게 엎어지고 싶지 않았다.  

임신의 모든 기간은 안심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조마조마하지 않을 안정기의 시작은 12주부터라고 했다. 이제 5주 차니 앞으로 7주가 남았다. 튼튼아, 힘내자.




· 업데이트 날짜: 2020.12.15
· 해당 글은 브런치 작가'당근쥬스'의 작품으로 최신 글을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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